10분에 끝낸 일을 50시간으로 청구하는 이유
문제는 개인의 정직성이 아니라 시간을 기준으로 값을 매기는 과금 방식이에요. 투입 시간과 결과물의 가치가 비례하지 않게 되면서 사람의 노동과 SaaS 요금제에서 같은 문제가 나타나고 있어요.
비즈니스시급 6만 원 개발자가 10분짜리 일을 50시간이라 적는 순간
시급 6만 원을 받는 개발자가 있어요. 어떤 기능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3년 전에 똑같은 걸 만들어본 기억이 나요. 그때는 꼬박 50시간이 걸렸어요. 이번에는 그 코드를 꺼내 10분 만에 붙였고, 잘 동작해요. 테스트도 통과했고요.
회사는 50시간을 줘야 할까요, 10분을 줘야 할까요?
10분만 지급하면 재사용으로 시간을 아낀 개발자의 보상이 줄어요. 50시간을 지급하면 실제 투입 시간만으로 정산한다는 원칙과 맞지 않고요. 같은 결과에 얼마를 지급할지 계약에서 정할 필요가 생겨요.
이건 개인의 정직성 문제가 아니에요. ‘투입한 시간 = 만들어낸 가치’라는 전제가 깨졌기 때문에 생기는 계약 구조의 문제예요. 그리고 이 문제는 사람의 노동 시장과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동시에 나타나고 있어요.
🔴 시급제가 작동하지 않는 네 가지 상황
시급제는 특정 조건에서 완벽하게 작동해요. 투입한 시간과 산출물이 비례할 때요. 문제는 지식노동에서 그 비례가 자주 깨진다는 거예요. 네 가지 장면을 볼게요.
첫째, 0시간짜리 아이디어. 샤워를 하다가 회사의 비용 구조를 바꿀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리서치도, 회의도 없었어요. 시급제는 이 아이디어에 얼마를 지불해야 할까요? 0시간이니 0원이에요. 회사는 아이디어를 따로 사지 않으니까요.
둘째, 재사용. 앞서 이야기한 50시간짜리 자산을 10분에 붙이는 경우예요. 과거의 50시간이 만든 가치를 지금의 10분으로 환산하는 방법이 시급제에는 없어요.
셋째, 에이전트 위임. 10시간짜리 작업을 AI 에이전트에게 맡기고, 계획을 검토하고, 결과를 검수하는 루프를 몇 번 돌려 30분에 끝냈어요. 이 30분의 값어치는 ‘무엇을 위임할지 아는 능력’에서 나오는데, 시급제는 그 능력에 값을 매길 방법이 없어요.
넷째, 실패한 10시간. 10시간을 쓰고 나서야 방향이 처음부터 틀렸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건 청구해도 될까요? 시급제는 이 10시간을 정당한 노동으로 인정해요. 앞의 세 장면은 인정하지 않고요.
시간당 단가가 같다면, 시행착오에 쓴 시간도 청구할 수 있지만 숙련돼 빨리 끝낼수록 청구액은 줄어요.
그래서 계약자는 시간제 고객을 거절할지 고민하게 되고, 실제보다 일한 시간을 부풀릴 유혹도 생겨요.
저는 시간을 부풀려 청구하는 방법을 권하지 않아요. 다만 어떤 구조가 특정 행동을 일관되게 보상한다면, 그건 그 행동을 하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가 잘못 설계됐다는 신호예요. 개인의 양심에 의존해야 지켜지는 계약이라면, 계약 조건 자체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는 뜻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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