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0호

EU가 8월 기한을 넘겼는데, 2027년 2월은 그대로예요

대상이 아닌 항목을 먼저 걷어내야, 진짜 받아야 할 자료가 보여요

비즈니스EU가 8월 기한을 넘겼는데, 2027년 2월은 그대로예요

EU는 자기가 정한 약속을 못지켰고 아직 기업들이 정한 기간은 남았어요.

2026년 8월 18일은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배터리 여권의 열람 권한 규칙을 확정했어야 하는 날이었어요. 그날 이행법령1은 나오지 않았고, 집행위의 디지털 제품 여권 일정표는 그 법령을 2026년 4분기로 옮겨 적어 뒀어요. 2027년 2월 18일부터 EU 시장에 놓이거나 사용에 들어가는 전기차 배터리, 경량운송수단 배터리, 용량 2kWh를 넘는 산업용 배터리는 QR 코드로 열리는 배터리 여권을 갖춰야 해요. 경량운송수단2은 전기자전거나 전동킥보드처럼 가벼운 이동수단을 말해요.

규칙은 늦게 오는데 기한은 고정이라는 조합이 지금 이 제도의 상태예요. 그래서 실무에서 먼저 할 일은 남은 기간을 세는 게 아니라, 2027년 2월에 실제로 요구되는 항목과 아직 시작하지 않은 항목을 갈라놓는 거예요. 집행위가 8월 15일자로 갱신한 안내 문서를 열어 보면 그 경계가 생각보다 또렷하게 나와 있어요.


대상 여부는 용량이 아니라 ‘누가 완제품을 내놓느냐’로 갈려요

여권이 필요한 배터리는 세 종류예요. 전기차 배터리, 경량운송수단 배터리, 용량 2kWh를 넘는 산업용 배터리. 가정용 에너지저장장치도 산업용 배터리로 분류돼 들어와요. 휴대용 배터리, 자동차 시동용 배터리, 2kWh 이하 산업용 배터리는 여권 대상이 아니에요. 규정의 다른 조항은 여전히 적용되지만 여권은 아니에요.

여기까지는 많이 알려진 내용이고, 실무에서 판단이 갈리는 건 그다음이에요. 집행위는 여권을 만들고 유지할 의무가 완제품 배터리를 시장에 내놓는 경제주체3에게 있고, 개별 부품이나 모듈 공급사에게 있지 않다고 명시했어요. 2026년 5월 설명회에서도 같은 설명이 나왔어요. 여권은 완성된 배터리에 붙고, 아직 조립이 더 필요한 모듈이나 팩 단계에는 붙지 않아요. EU 안에서 만들면 제조사, 밖에서 들여오면 수입자나 공인대리인이 의무자가 돼요.

그래서 부품·소재 회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우리가 여권을 발행해야 하나”가 아니에요. “우리 고객 중 누가 여권 의무자이고, 그 사람이 2027년 2월에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게 되나”예요. 이 두 질문은 준비해야 할 일의 종류가 완전히 달라요. 앞쪽은 시스템 구축 과제고, 뒤쪽은 데이터 계약과 서식 협의 과제예요.

여권이 모델 단위가 아니라 개별 배터리 한 대마다 붙는다는 점도 미리 잡아둬야 해요. 고유 식별자와 QR 코드가 물리적 낱개에 대응하고, 등록은 집행위가 운영하는 디지털 제품 여권 등록부를 거쳐요. 이 등록부는 2026년 7월 20일에 문을 열었고, 운영 규칙을 담은 이행규정이 8월 6일 발효됐어요. 등록하려면 전자신원확인 체계를 기반으로 한 경제주체 인증을 먼저 받아야 하고, 이 인증은 3년마다 갱신해야 해요.

71개 항목 중 전기차는 15개를 비워 둬요

집행위 내부시장총국이 8월 15일자로 낸 안내 문서 2.0판은 여권에 들어갈 항목을 하나씩 세어 놓고, 항목마다 전기차·경량운송수단·산업용에 대해 의무인지 선택인지 조건부인지를 따로 표시했어요. 이 표를 직접 내려받아 세어 봤어요. 항목은 모두 71개고, 각 항목의 상태를 카테고리별로 집계하면 이렇게 나와요.

구분전기차경량운송수단산업용(2kWh 초과)
전체 항목717171
2027년 2월에 채우지 않는 항목151212
남는 항목565959

비워 두는 15개의 내역이 이 문서에서 가장 실용적인 부분이에요. 중복이라 지운 항목 2개(소재 구성, 정격 용량)를 빼면, 탄소발자국 선언과 라벨, 책임 있는 광물 조달 정보, 코발트·리튬·니켈·납 네 가지의 재생원료 비율이 전부 “2027년 2월에는 채우지 않음”으로 표시돼 있어요. 배터리 여권 하면 떠올리는 항목들이 대체로 여기에 몰려 있어요.

이유는 항목마다 조금씩 달라요. 탄소발자국은 신고 서식을 정할 이행법령이 아직 없어요. 재생원료 비율은 규정 제8조에 따른 위임법령4이 계산·검증 방법을 정해야 적용되는데, 그 초안이 2026년 9월 초까지 의견 수렴 중이었어요. 신고 의무 자체는 2028년 8월 이후로 잡혀 있고, 법령 발효 시점에 따라 더 밀릴 수 있어요. 책임 있는 광물 조달은 공급망 실사5 의무와 묶여 있는데, 이 의무는 2025년 8월에서 2027년 8월 18일로 2년 미뤄졌어요. 옴니버스 4차 간소화 패키지의 일부로 2025년 7월에 확정된 변경이에요.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어요. 이 연기는 여권 날짜를 건드리지 않았어요. 실사 의무가 2027년 8월로 갔다는 사실을 “여권도 미뤄졌다”로 읽은 자료를 실제로 여럿 봤고, 일부 상용 안내 페이지에는 아직 “2025년 8월부터 적용 중”이라고 적혀 있어요. 시작한 적 없는 의무예요. 준비 일정표를 짤 때 확정된 의무와 아직 시작하지 않은 의무를 같은 칸에 넣으면, 예산이 양쪽 모두에서 잘못 배분돼요.

배터리 종류에 따라 표가 달라진다는 점도 놓치기 쉬워요. 건강 상태 항목이 대표적이에요. 전기차는 인증 에너지 상태 하나만 채우고 나머지 다섯 개를 비우는데, 경량운송수단은 정확히 반대로 그 다섯 개를 채우고 인증 에너지 상태를 비워요. 두 카테고리의 건강 상태 항목이 하나도 겹치지 않아요. 산업용은 남은 59개 가운데 스무 개 넘는 항목이 “해당하는 경우에만”으로 표시돼 있어서, 제품별로 적용 여부를 따로 판정해야 해요.

남은 칸의 무게는 공급사 쪽에 쏠려 있어요

그럼 비우고 남은 56개는 쉬운 항목일까요. 절반은 그래요. 제조사 이름과 주소, 모델과 배치 번호, 제조 장소와 시기, 무게, 용량, 화학 조성, 전압 범위. 대부분 이미 사양서나 전사적자원관리 시스템에 있는 값이에요.

문제는 나머지예요. 규정 부속서 13의 두 번째 묶음6에 들어 있는 항목들이 세 카테고리 모두에서 의무로 표시돼 있어요. 양극·음극·전해질에 쓰인 소재를 포함한 상세 조성, 부품별 부품 번호, 교체 부품 조달처 연락처, 그리고 해체 정보예요. 해체 정보에는 배터리 시스템 분해도와 분해 순서, 필요한 공구까지 들어가요. 무게 기준 0.1%를 넘는 핵심 원자재 목록도 첫 번째 묶음에서 이미 의무고요.

이 값들은 대개 셀 제조사 혼자 갖고 있지 않아요. 양극재·음극재·전해질 회사, 부품 회사에서 올라와야 하는 자료예요. 여권 발행 의무는 완제품을 내놓는 쪽에 있는데, 필수 항목의 원본은 그 위 단계에 흩어져 있는 구조인 거죠.

그리고 이 묶음이 바로 앞에서 말한 열람 권한 문제와 겹쳐요. 상세 조성과 해체 정보는 아무나 QR을 찍어서 볼 수 있는 공개 구간이 아니라, “정당한 이익을 가진 자”만 열람하는 제한 구간이에요. 수리업자나 재활용업자를 염두에 둔 설계인데, 누가 거기에 해당하고 받은 자료를 내려받거나 다시 쓸 수 있는지를 정하는 이행법령이 아직 안 나왔어요. 협력사에서 영업비밀에 가까운 자료를 받아야 하는데, 그 자료를 누가 보게 될지는 확정되지 않은 상태예요. 공급사가 제출을 망설일 이유로는 충분해요.

국내 준비 상황도 이 지점에서 갈려요. 대한상공회의소와 한국산업단지공단이 수출기업 300개사를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가 2026년 8월에 나왔는데, 응답 기업의 99.3%가 고객사로부터 탄소배출 데이터 제출을 이미 요구받았거나 받을 예정이라고 답했어요. 90.3%는 자기도 협력사에 같은 요구를 하고 있거나 할 계획이라고 했고요. 그런데 관리 방식을 복수응답으로 물었더니 사내 시스템을 쓴다는 응답이 66.3%, 엑셀이나 수기 문서가 42.4%, 고객사별 개별 서식이 38.8%였어요. 요구는 이미 도착했고 서식은 아직 제각각이라는 뜻이에요.

battery배터리 3사 쪽은 업계 취재 기준으로 움직임이 확인돼요. LG에너지솔루션은 여권이 요구하는 데이터가 사내 시스템과 연동되도록 통합 관리 체계를 만들고 제품 단위 탄소발자국 산정 시스템을 갖췄고, 삼성SDI는 글로벌 배터리 얼라이언스에 참여해 여권 시범 사업을 하고 있어요. SK온은 부품업체에서 셀 제조사를 거쳐 완성차로 이어지는 정보 흐름을 만들고 여권 발행 과정을 실증했고요. 다만 이건 공시나 공식 발표가 아니라 업계 취재를 정리한 내용이라, 각 사의 준비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는 그것만으로 판단하기 어려워요.

오스왈드의 시선

이 구조가 낯설지 않았어요. 제가 관세노트라는 서비스를 만들면서 거의 같은 문제를 붙잡고 있었거든요. 선하증권 번호 한 줄을 넣으면 통관 진행 상황부터 품목분류 코드, 세율, 수입요건, 관련 법령, 무역통계까지 한 화면으로 이어주는 서비스인데, 관세청 공공데이터 6종을 실제로 연동하고 인증키를 53종 확보하는 데 시간의 상당 부분이 들어갔어요. 이 서비스로 2026년 관세청 공공데이터·AI 활용 창업경진대회에 나가 수상했어요.

관세노트 — 관세 실무의 흐름을 끊지 않는 워크스페이스HS 분류·관세율·법령·판례·AI 상담을 한 화면에서. 관세 실무자를 위한 워크스페이스.customsnote.kr

만들면서 내린 결정 하나가 이번 주제와 정확히 겹쳐요. 품목분류 코드는 AI가 후보를 뽑아주면 편해요. 그런데 저는 AI가 제시한 후보를 관세청 공식 데이터로 다시 검증하게 하고, 검증되지 않은 코드는 아예 화면에 띄우지 않도록 막았어요. 빈칸이 남는 게 불편했지만, 근거 없이 채워진 칸이 훨씬 위험하다고 봤어요. 세관에 제출되는 숫자는 틀렸을 때 되돌리는 비용이 화면이 비어 있을 때의 불편과 비교가 안 되니까요.

배터리 여권도 같은 성질의 자료예요. 2027년 2월에 시장감시 당국이 열어보는 기록이고, 값 하나하나가 나중에 추적당하는 숫자예요. 그래서 준비의 1번이 시스템 구축이라는 말에 저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워요. 그보다 먼저 필요한 건 필드마다 “이 값은 어디서 왔고 누가 책임지는가”를 적어두는 일이에요. 출처가 비어 있는 칸은 지금 비어 있는 게 나아요. 협력사에서 못 받은 값을 사내 추정치로 메우기 시작하면, 2028년에 탄소발자국과 재생원료 항목이 켜질 때 그 추정치가 기준선으로 굳어버려요.

한 가지는 유보해 둘게요. 저는 관세 실무 데이터에서 이 판단을 얻었고, 배터리 공급망은 단계가 더 깊고 영업비밀 민감도도 달라요. 협력사가 상세 조성을 내주느냐는 데이터 설계가 아니라 계약과 협상의 문제고, 거기서는 제 경험이 그대로 적용된다고 말하기 어려워요.

마치며

우리 제품이 세 카테고리 중 하나에 들어가는지, 우리가 완제품을 내놓는 의무자인지 자료를 올려보내는 쪽인지, 71개 항목 중 우리 카테고리에서 실제로 켜져 있는 칸이 무엇인지까지 와야 협력사에 보낼 요청서의 내용이 정해져요.

날짜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볼 필요가 있어요. 2027년 2월 18일은 규정 본문에 박혀 있어서 기술적인 사유로 미뤄지기 어려운 날짜예요. 반대로 그 안을 채우는 세부 규칙은 계속 늦어지고 있고, 지금까지 여러 번 밀렸어요. 안내 문서도 2.0판이고 다음 판이 예고돼 있어요. 여권 자체의 존재 의무와, 그 안에 무엇이 들어가는지를 분리해서 추적하는 게 지금으로서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 같아요.


💬 구독자님 회사에서는 배터리 여권 준비를 규제 대응 조직이 맡고 있나요, 아니면 품질이나 정보시스템 쪽이 맡고 있나요? 어느 부서가 쥐느냐에 따라 협력사 요청서의 모양이 꽤 달라지더라고요.

📨 유럽 수출 담당이거나 공급망 자료 요청을 받기 시작한 동료가 있다면, 71개 항목 표 부분만이라도 전달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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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안광섭 (오스왈드)은 세종대학교 겸임교수, INLEVEL9 전략 컨설턴트입니다. 경력, 연구, 저서와 최신 활동은 저자 소개에서 계속 갱신합니다. 최근 소식 · 2026년 8월: 2026 세종도서 교양부문 우수도서 선정.

📝 용어 설명

각주

  1. 이행법령(Implementing act): EU 법에서 이미 정해진 규칙을 각국이 똑같이 적용하도록 집행위가 세부 절차를 정하는 하위 법령이에요. 회원국 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채택돼요. ↩

  2. 경량운송수단(LMT) 배터리: 전기자전거, 전동스쿠터처럼 가벼운 이동수단에 들어가는 배터리를 말해요. EU 배터리 규정이 따로 분류한 범주예요. ↩

  3. 경제주체(Economic operator): 제품을 시장에 내놓는 쪽을 가리키는 EU 법 용어예요. 제조사, 수입자, 공인대리인, 유통업자가 여기 들어가고, 역할에 따라 의무가 달라요. ↩

  4. 위임법령(Delegated act): 상위 규정이 집행위에 권한을 넘겨 기술적 세부 사항을 정하게 하는 법령이에요. 계산 방법론처럼 전문성이 필요한 부분에 주로 쓰여요. ↩

  5. 공급망 실사(Due diligence): 코발트·흑연·리튬·니켈 같은 원자재가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를 기업이 직접 확인하고 위험을 관리하는 절차예요. 정책 수립, 위험 평가, 제3자 검증, 공개 보고가 함께 묶여요. ↩

  6. 부속서 13의 두 번째 묶음: 규정 부속서 13은 여권 항목을 열람 권한별로 나눠 놓았어요. 두 번째 묶음은 정당한 이익을 가진 자와 집행위만 볼 수 있는 제한 구간으로, 상세 조성과 해체 정보가 여기 들어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