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과 나이키가 줄 서는 두 회사
ASML은 장비를 팔고, YKK는 지퍼 만드는 기계를 팔지 않아요
비즈니스슈퍼 을들의 공통점
삼성전자 경영진은 극자외선 노광장비1를 한 대라도 더 확보하려고 네덜란드의 인구 4만 소도시로 날아가요. 나이키와 리바이스, 파타고니아는 옷을 만들 때 일본 도야마현 회사의 지퍼를 콕 집어 주문서에 적어 넣고요. 갑으로 불리는 회사들이 을 앞에 줄을 서는 셈이에요. 한국 언론이 ASML에 ‘슈퍼 을’이라는 별명을 붙인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두 회사가 그 자리에 오른 경로는 정반대예요. 둘의 공통점은 ‘제품을 만드는 기계’를 장악했다는 것이고, 차이점은 ASML은 그 기계를 팔았고 YKK는 외부에 팔지 않았다는 거예요. 이 정반대의 선택이 어떻게 같은 결과로 이어졌는지, 그리고 어떤 조건이 두 회사의 선택을 갈랐는지 살펴볼게요.
기계를 숨긴 회사 YKK: 설비를 직접 만들고 팔지 않아요
YKK는 2024 회계연도에 지퍼를 100억 개 팔았어요. 이어 붙이면 300만 km, 지구 80바퀴 분량이에요. 하버드비즈니스리뷰 추정으로 세계 지퍼 시장의 금액 기준 약 40%, 수량 기준 약 20%를 이 한 회사가 가져가요. NASA 우주복부터 청바지까지 쓰이는 곳도 다양해서, 일본에서만 지퍼 종류가 10만 가지를 넘어요.
비결로 흔히 품질이 꼽히는데, 저는 절반만 맞는 답이라고 봐요. 1934년 창업자 요시다 다다오가 세운 원칙은 ‘좋은 지퍼’가 아니라 ‘좋은 지퍼가 나올 수밖에 없는 공정’이었거든요. YKK는 황동을 직접 제련하고, 폴리에스터 원사를 직접 뽑고, 지퍼 테이프를 직접 짜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모든 걸 수행하는 기계를 도야마현 구로베의 자체 시설에서 직접 설계하고 제작해요. 이 기계는 어떤 가격에도 외부에 팔지 않아요. 경쟁사가 지퍼는 베낄 수 있어도, 기계는 볼 수조차 없는 구조예요.
기계를 직접 만들어 쥔 이 방식의 위력은 미국 시장에서 드러났어요. 1960년 뉴욕에 사무소를 낼 때만 해도 미국 1위 탈론이 지퍼 10개 중 7개를 쥐고 있었어요. 그런데 YKK가 자사 기계를 미국 의류 공장들에 리스로 들여놓기 시작하자 판이 뒤집혀요. 블룸버그에 따르면 기계 리스를 시작한 뒤 10년 만에 미국 법인 매출이 1억 달러 미만에서 약 4억 5,000만 달러로 뛰었고, 1980년대 후반에는 미국 1위 자리를 가져와요. 고객 공장 안에 내 기계가 돌아가는 순간, 지퍼 공급자를 바꾸는 일은 부자재 교체가 아니라 생산 라인 교체가 되거든요. 탈론의 점유율은 지금 한 자릿수예요.
이 기계가 만드는 품질이 왜 결정적인지 보여주는 극단적인 고객도 있어요. 미군에 생존 장비를 납품하는 스위틀릭이에요. 이 회사의 드라이수트에서 지퍼는 물을 막는 최후의 방어선이라, 지퍼가 새는 순간 사람을 살리는 장비가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는 장비로 바뀌어요. 그래서 스위틀릭은 미 공군용 구명조끼에 들어가는, 팽창할 때 스스로 터지며 열리는 퀵버스트 지퍼를 YKK와 공동 개발했어요. 지퍼는 옷값의 1%도 안 되는 부품이지만, 이런 구매자는 가격이 아니라 실패의 비용으로 계산해요. 이 시장에서는 저가 공세가 애초에 통하지 않아요.
중국의 저가 공세에 대한 대응도 같은 방식이에요. 1984년 창업한 푸젠성의 SBS는 YKK를 끌어내리겠다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회사인데요. WSJ 영상에서 YKK 임원이 밝힌 대응책은 가격 인하가 아니라, 품질 저하 없이 원가 경쟁력 있는 지퍼를 뽑아내는 새 기계의 자체 개발이었어요. 값을 내리는 대신 기계를 새로 만들어 맞선다는 뜻이에요. YKK가 지금도 비상장 회사로 남아 분기 실적 압박 없이 10년 단위의 설비 투자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도 이런 대응을 가능하게 해요.
물론 그림자도 있어요. 2007년 EU 집행위는 지퍼·파스너 가격 담합으로 7개 그룹에 총 3억 2,800만 유로를 부과했고, 그중 YKK 몫이 약 1억 5,000만 유로로 가장 컸어요. 경쟁이 제한된 시장에서는 가격 담합의 유인도 커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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